저는 언제나 좋은 게임을 바라면서도 자본이 많이 투입된 게임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습니다.
제 경험 상 거대 자본과 화려한 마케팅 기술을 등에 업은 게임에서 강하게 기대할 수 있는 요소는 그래픽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한편 그에 맞는 분량과 콘텐츠 볼륨 역시 보장되는 편이긴 하지만,
그 모든 콘텐츠를 다 흡족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적도 드물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AAA 게임을 접할 때 피로감이 쉽게 몰려오고,
이제는 AAA 게임의 발표 소식을 들어도 썩 기대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기업 게임의 반대편에 있는 인디 게임들은 어떨까요?
이제 스팀에는 1년에 10,000개 정도의 게임이 등록된다고 합니다.
이들 중 절대 다수는 1인, 혹은 소규모 팀으로 제작되는 인디 게임이겠죠.
별도로 배급사를 두지 않는 경우도 정말 많습니다.
이런 인디게임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적다는 한계가 있지만,
제작자의 의도가 온전히 반영될 수 있기 때문에 플레이 경험에 있어 만족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오늘 소개드릴 게임도 그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디 게임입니다.
Nordhold 노르드홀드는 독일의 제작사에서 2명의 개발 인원으로 만들어진 작은 인디 게임이고,
Steam Next Fest 2월 에디션에서 처음 접하게 된 로그라이크 타워디펜스 게임입니다.

Nordhold 노르드홀드의 콘셉트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타워디펜스’와 ‘로그라이크’는 모두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생소하지 않은 개념이고,
어쩌면 더 이상 이런 종류의 게임을 바라지 않는 사람도 많을지 모릅니다.
게임을 개발하는 접근 방향의 한 가지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기보다
이미 존재하고, 특히 검증된 아이디어를 적절히 혼합하여 빚어내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개발 방식의 장점은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증명할 필요가 적고,
기존의 장르 팬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개발자 역시 아이디어의 핵심 기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개발 기간과 자원을 아낄 수도 있게 됩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이 개발 방식을 택하는 게임들은 좋든 싫든 아이디어를 빌려온 게임과 끝없는 비교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비슷한 장르의 게임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해야 하죠.
이런 단점들이 있음에도 기존의 아이디어를 빌려 게임을 만드는 이유는 장점이 너무나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죠.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지나치게 새로운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Nordhold 노르드홀드의 첫 인상은 그냥 그랬습니다.
그래픽에는 매력을 담지 않으려는 듯 투박한 UI와 아트가 첫째 이유였고,
타워디펜스 특유의 느린 진행이 두 번째였죠.
말이 나온 김에 타워디펜스라는 장르에 대해 조금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타워디펜스는 꾸준히 수요가 있는 꽤 오래된 장르입니다.
적을 직접 공격한다는 액션 게임의 개념과는 달리 적이 공격 범위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공격하는 ‘타워’를 설치하고,
적들을 물리치고 얻는 재화를 활용해서 점점 강해지는 적의 공세에 더 견고한 방어체계로 막아내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타워디펜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개발이 쉽고 가벼운 용량으로 만들 수 있어 비교적 캐주얼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 3》의 커스텀 레벨 에디터를 통해 만들어진 유저 제작 맵이 이 장르에 많은 기여를 하기도 하였죠.
Nordhold 노르드홀드의 전반적인 디자인에서 《워크래프트 3》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또한 《DOTA 2》나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MOBA 장르의 출발도 타워 디펜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Nordhold 노르드홀드는 여기에 ‘로그라이크’를 한 스푼 끼얹은 모양입니다.
로그라이크에 대해서는 제가 업로드한 《Balatro》 관련 영상에 짧게 설명한 바 있으니,
관심이 있으시면 한번 시청해 보세요.
로그라이크의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면 절차적 무작위 생성(procedural random generation)과 영구적 죽음(perma-death)입니다.
절차적 무작위 생성이란 게임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
그러니까 맵, 아이템, 적 등 게임이 진행되며 맞닥뜨리는 오브젝트를 난수 생성을 통해 무작위로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롤플레잉 게임에서 적 몬스터를 처치했을 때 아이템이 확률적으로 등장하는 것 역시 같은 개념입니다.
게임에 무작위 요소가 들어가면 플레이어는 행동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특히 그 결과가 기대했던 것보다 좋을 때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보상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게임에 지속적으로 빠져들게 하는 큰 동력이 됩니다.
영구적 죽음의 개념도 어렵지 않습니다.
오락실에 있는 아무 게임을 해봐도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컴퓨터나 콘솔 게임에 저장 시스템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저장한 시점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과 반대로요.
따라서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조건에 ‘캐릭터의 강함’은 부차적인 요소가 되며,
핵심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임의 전개 양상 파악과 그 과정에서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플레이어의 게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영구적 죽음을 약간 비틀어 영구적 강화 요소(meta progression)를 적용한 게임들도 생겨났습니다.
이는 로그라이크 게임들에서 아무리 잘 성장해도 죽으면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게임의 진행도에 따라, 혹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화를 통해
다음 게임에도 유효한 업그레이드를 적용하는 개념입니다.
이런 요소를 차용한 게임들은 로그라이크(Rogue-like)와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하여
로그라이트(Rogue-lit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럼 Nordhold 노르드홀드는 어떨까요?
Nordhold 노르드홀드 역시 영구적 강화 요소가 존재하는 로그라이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얻게 되는 명예(Honor)를 통해 초기 자원의 양을 늘이거나 상급 건물을 해금할 수 있죠.
또한 적들이 몰려오는 웨이브를 맞이하기 위해서 맵을 확장하는데, 이때 맵은 절차적으로 랜덤 생성됩니다.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 받을 수 있는 보너스와, 게임을 진행하며 받는 보상의 선택지도 랜덤으로 주어지죠.
하지만 이런 요소들만으로 Nordhold 노르드홀드를 로그라이크, 또는 로그라이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타워디펜스와 랜덤 요소를 결합한 것은 Nordhold 노르드홀드가 처음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 3》의 커스텀 타워디펜스에도 랜덤 요소를 통해
수비하는 유닛이나 보상을 무작위로 결정하는 시스템이 있었거든요.
이런 랜덤 디펜스들은 《Autochess》를 위시한 오토배틀러 장르의 시초로 여겨집니다.
타워디펜스와 영구적 죽음 역시 낯선 조합이 아닙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그 판은 종료되고, 다음 판은 처음부터 다시 쌓아가는 것은 타워디펜스의 기본 공식과도 같은 이야기죠.
영구적 강화 요소도 《식물 vs 좀비》 같은 게임의 선례가 있습니다.
Nordhold 노르드홀드만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랜덤으로 생성되는 지형과 그 위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랜덤 지형이 게임에 미치는 영향은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일정 단계 이후의 지형에서 갈림길이 나오거나 굽은 길의 사이에 타워를 설치하는 전략적 행동의 기틀이 되긴 하지만
이것은 다양한 가능성 중 특정 요소의 등장이라는 무작위 생성의 의미와 크게 시너지를 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쩐지 Nordhold 노르드홀드에 금방 빠져들었습니다.
타워디펜스라는 장르는 타워를 건설하고 몰려드는 적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거든요.
게다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타워디펜스는 전략 게임 장르의 하위 줄기로,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많이 강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게임입니다.
Nordhold 노르드홀드에도 다양한 자원 수급 방법이 있으며, 어떤 자원을 중점적으로 수집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건설할 수 있는 타워는 8종류가 있고 각각의 타워는 저마다 확실한 개성이 있어서
어떤 타워를 주력으로 사용할지, 또 보조 타워를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등의 전략적 재미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유물과 보상, 타워 업그레이드 역시 단순한 파워 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많은 수의 유물이 +1을 주는 형식이 아닌 +2, -1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전략의 수를 제한하고 있죠.
수집하는 자원의 양을 늘려주는 업그레이드와 시간을 들여 개발해야 하는 연구 역시 모든 경우의 수를 한번에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Nordhold 노르드홀드는 로그라이크 요소가 결합된 타워디펜스라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로그라이크적 요소는 강하지 않고, 오히려 세밀하고 정교한 정통 타워디펜스에 가깝다는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Nordhold 노르드홀드가 재미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장르적 특성에 크게 의지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타워디펜스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계승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원 수집 경로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서 결국 최적화 형태 찾기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찾는 과정은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똑같은 반복 작업의 연속일 뿐입니다.
따라서 Nordhold 노르드홀드는 타워디펜스의 공식에 무작위 요소를 도입하여 변주를 주려 한 점이 보였으나,
아쉽게도 약간의 효과밖에 주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는 것에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타워디펜스 게임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에겐 장르의 입문작으로써
혹은 전략적 사고를 좋아하는 플레이어에게 하루 1~2시간 정도 꾸준히 할 만한 게임으로써
Nordhold 노르드홀드는 추천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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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풀어내는 게임 이야기는 유튜브 채널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EPLAcolon